‘북한’은 일종의 판타지였다. 초등학교 때 ‘통일포스터’ 대회가 열리면, 북한 사람을 늑대나 돼지로 그리는 친구들이 꼭 한 명은 있었다. 북한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념, 막연한 공포가 지배하는 땅이었다. 지난 5월 16일, 개성공단을 직접 다녀왔다. 개성에 머물렀던 일곱 시간은 단단했던 판타지를 깨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이번 방문은 사회복지단체 ‘러빙핸즈’와 ‘낙원건설주식회사’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러빙핸즈는 북한에 전지분유 지원 가능성을 타진 중이고, 낙원건설은 개성공단에 아파트형 공장을 짓고 있는 건설회사다. (편집자 주)

흰색 울타리 안쪽은 개성공단, 녹색 울타리 바깥은 개성 외곽이다. 그 사이에는 인민군이 경계근무 중이다.

첫 번째 판타지
북한은 오랫동안 ‘볼 수는 있지만 갈 수는 없는 땅’이었다. 개성공단 방문 하루 전, 그간 미디어에 보도된 관련 기사들을 출력했다. A4용지 50여 장, 한 뭉치였다. 일산에 있는 낙원건설 사무실로 가는 길에도, 개성공단까지 운전을 한 낙원건설의 남상준 부사장(50)의 차 안에서도 자료를 읽었다. 사진을 보고, 기사를 읽어도 개성은 막연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실체도 없었다.

오전 8시 10분, 자유로를 타고 달렸다. 9시 ‘출경(出京, 남측 경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가는 것을 출경이라고 한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가다 남 부사장이 말한다. “개성이 먼 곳인 줄 아셨죠? 저기 울타리 너머가 북한이에요. 가깝죠?” 강변북로를 달리다가 63빌딩을 바라보는 거리보다 가까워 보였다.

9시에 열리는 개성공단에 들어서기 위해 줄 선 남측 차량들. 주황색 깃발은 남측 차량이라는 표시다.
‘북한’의 실체가 다가오고, 판타지가 깨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개성은, 일단 물리적으로 가까웠다. 육로로 한 시간이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막연하게 섞였다. 그러면서도 미리 출력해간 자료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 이때는, 이 자료들이 개성에 대한 두 번째 판타지를 깨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리라는 걸 알 도리가 없었다.

통일전망대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 도라산 출입국관리소(CIQ)에 도착했다. 미리 발급받은 ‘방문증명서’와 수첩을 들고 내렸다. 운전자의 수속은 따로 이뤄졌다. 공항에 있는 출입국관리사무소와 비슷한 풍경, 가지고 온 짐을 검색대 위에 놓고, 금속감지기를 통과했다. 수속을 마치고 다시 남 부사장의 승용차에 올랐다.

“여기가 남방 한계선입니다. 여기서부터 4km는 비무장지대죠. 아, 혹시 잡지나 출판물 같은 거 있으면 안 됩니다. 가지고 오셨다면 저한테 맡기세요.”

“여기 기사 출력한 인쇄물 한 뭉치 있는데요.”
“그래요? 괜찮을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괜찮지 않았다. 4분여를 달리자 북방 한계선이다. 인민군이 지키고 섰다. 남방 한계선의 남측 군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표정은 굳었고, 몸은 경직됐다. “북측 군인들은 군기가 바짝 들었죠. 초반에는 전봇대 같았어요. 공단 안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또 다를 겁니다.” 인민군보다 먼저 눈에 띈 건 붉은색 아카시아였다. 남 부사장에 따르면, 붉은 아카시아는 북한에서 만든 개량종이다. 북측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일종의 신호가 된다. 민둥산은 또 하나의 신호다. “나무가 거의 없죠. 북한은 아직 화목 연료를 때서 그렇습니다. 지금이 5월이라 좀 녹색이 보이지, 겨울에는 더 황량해요.”

북측 CIQ를 지나 개성 공단으로 진입했다. 오랫동안 개성공단을 드나든 남 부사장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요즘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드나든다. “오늘 들어오는 날인가? 온제 가십네까?” 제복을 입은 북측 관리원은 익숙하게 말을 걸어온다. 낙원건설의 아파트형 공장 건설 현장으로 가기 전에, 잠시 차에서 내렸다. 개성공단에 입주해 있는 ‘우리은행’과 ‘훼미리마트’의 개성공단 지점은 생소하고 익숙하다. 잠시 후, 발걸음을 재촉하는 남 부사장을 따라 다시 차에 올랐다.

“아, 우성씨, 아까 그 출력한 거 저 친구가 좀 보겠다고 가져갔어요.”
그러려니 했다. 무식이 죄다. 남 부사장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라길래, 개인적인 호기심이겠거니 치부했다. 약 7시간 후, 이 인쇄물이 ‘입경(入京, 남방 한계선을 넘는 것)’ 길의 발목을 잡았다. 좁다란 방 안에서 완고한 북측 관리소 직원과 1:1로 대면하게 될 줄을, 이때는 몰랐다. 생경한 개성공단 풍경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일단 방문이 예정된 업체들을 돌아봐야 했다.

개성공단의 남측 사람들과 북측 근로자들
개성공단에는 1백83개의 업체가 입주해 있다. 섬유, 봉제, 전기, 전자 제조업체들이 주다. 방문 전에 남 부사장의 설명을 들었다. “북측 근로자의 기본급은 월 52.5불입니다. 남녀 동일해요. 북측 근로자 대표인 직장장의 경우엔 직급수당을 합쳐 1백2불을 받습니다. 저희는 근로자 지급 총액이 7천불 정도 돼요. 약 7백만원이죠. 낙원건설은 북측 근로자 1백22명을 두고 있는데, 남한이라면 중간 관리자 2명을 쓰는 비용밖에 안 됩니다.”

“비정규직은 없느냐”는 질문은 우문이었다. 북측에는 애초에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없다. 비정규직은 자본주의의 개념이다.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개성개발지도총국에서 관리한다. 임금도 마찬가지다. 직접 근로자의 손에 쥐어지진 않는다. 총국으로 들어간 임금은 평양에서 관리한다. 근로자는, 인민화와 배급표를 받는다.

두 곳의 업체를 방문했다. 개성공단이 열린 2003년부터 입주해 공장을 경영해온 ‘원년 멤버’ (주)로만손과 ‘만선코퍼레이션’이다. 로만손은 시계와 보석을 만들고, 만선은 닥스, EXR 등의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옷을 생산한다.

#1 (주)로만손 오문표 개성 법인장
(주)로만손은 2004년 10월 개성공단 시범단지 입주 업체로 승인받았고, 2005년 8월 개성공장을 준공했다. 올해로 3년째다. 오문표 개성 법인장(51)은 공장 가동 초기에는 한 달에 한 번,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개성과 남한을 넘나든다고 한다. “부부가 떨어져 지내다 보니 금슬도 좋아진다”며 웃었다. “전에는 못하던 속 깊은 얘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개성공단에서의 생활에는 대체로 만족한다. 작업 성취도도 높은 편이다.

개성공단에서 공장을 경영하는 데 장단점이 있을 겁니다.
“남측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30일 안에 제품 생산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20일 만에도 가능해요.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직장장을 통해 긴급 오더를 내리면 ‘총화(일종의 회의)’를 통해 조직력을 모읍니다. 서열과 계급이 확실한 체제 안에서, 근로자는 책임감을 갖고 움직입니다. 개인보다 단체가 우선해요. 일사불란하고 확실하게 생산을 완료하죠. 직장장을 통하면 확실합니다. 조직 관리가 간편하죠.”

근로 환경은 어떻습니까?
“시설은 남측보다 월등히 낫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으로 운영하는 탁아소도 있고, 샤워 시설, 문화 시설도 갖추고 있어요. 음악 활동도, 배구, 배드민턴 등의 체육 활동도 할 수 있죠. 작업 시간은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5시 반까지 8시간입니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주 48시간 근로시간을 엄수합니다.”

최근 남북 관계 경색에 따른 개성공단 내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경직되진 않았나요?
“개성공단에 상주하는 통일부 직원들이 방출됐죠. 하지만 공단 내 분위기는 예전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내용과는 약간 다르죠. 개성공단 내에서 정치색, 이념 등은 배제하고 일합니다. 민간 차원의 교류, 협력이죠. 그래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회사 주가는 대폭 하락합니다(웃음).”

시계나 보석류가 없어진 적은 없나요. 남측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일인데요.
“초반에 4~5개 없어진 적이 있습니다. 직장장을 통해 항의했죠. 그랬더니 바로 총화를 합니다. 범인은 못 찾았지만 물건은 찾았어요. 이후 분실 사고는 없습니다. 북측 근로자들은 책임감과 자존심이 강해요.”

#2 만선코퍼레이션 이숙자 법인장
이숙자 법인장(43)은 개성공단 유일의 여성 법인장이다. 법인장은 북측 근로자와 가장 가깝게 일하는 남측 사원이다. 상대적으로 여성 근로자가 많은 개성공단의 특성상, 이숙자 법인장은 북측 근로자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용이하다. 물론 처음부터 쉽진 않았다. 기술을 가르치고,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쌓였다. 만선코퍼레이션 개성공장에서는 북측 근로자 1천50명이 일한다. 개성공단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북한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일해요. 일하는 입장에서 마음의 벽은 없어요. 개성공단의 수익이 바로 노동자에게 가지는 않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죠. 이렇게 민간기업이 하나 둘씩 들어와서 확대가 되면 마음의 벽은 금세 허물어지지 않을까요(웃음).”

2003년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많이 다르죠?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죠. 눈도 안 마주치고 그랬어요(웃음). 지금은 다릅니다. 처음에 일을 가르칠 때는, 북측 근로자들이 모두 처음 접하는 일이다 보니 어렵게 배웠죠.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고, 성실했어요. 다 가르치고 나면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빼먹지 않아요. 기본적인 인성교육이 잘돼 있는 것 같아요. 책임감과 도덕성이랄까요. 개개인이 구사하는 문장들도 일목요연합니다. 악기도 잘 다루고, 춤도 잘 춰요. 체제와 문화는 다르지만, 기본적인 교양은 잘 갖추고 있죠. 자존심이 강하고, 손재주는 섬세합니다. 이론교육 습득이 빠르고 공동체 생활을 잘해 일사불란합니다. 품질은 자부할 수 있어요.”

초반의 어려움은 어떤 거였죠?
“경계심이죠. 하지만 남측 기술인이 묵묵히 끌고 가면 선생으로 예우를 해줘요. 초반에는 저를 판단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냐 아니냐,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 존중할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그들도 판단하는 거죠. 배울 점이 있고, 존중할 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서면 확실하게 일을 잘합니다.”

출퇴근 풍경도 궁금하네요.
“출근 시간 20분 전에는 모두 나와서 준비를 해요. 빨래도 하고, 작업 준비도 하죠. 북측 근로자들의 경쾌한 발걸음과 여자 근로자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면 유쾌해집니다. 물론 핸디캡도 있죠. 하지만 사업하는 입장에서 그 정도의 핸디캡은 어디나 있는 거죠.”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대부분 여성인데, 남자 근로자는 몇 명인가요?
“만선의 1천50명 중 남자는 백 명이에요. 북측은 아직 가부장이 강한 사회라, 처음에는 여자 관리자를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북측 남자들은 집 안에서 빗자루질 같은 허드렛일도 안 해요.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이 남아 있죠. 우리 사장님은 북측 여자 근로자들이 무거운 걸 들면 도와주곤 했는데, 남자 근로자들은 사장님을 보고 웃으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남측 남자들은 희한하구만, 선생 그거 달려 있습네까?’ 그러면서요(웃음).”

#3 낙원건설 남상준 부사장
낙원건설은 지난 1996년 4월부터 대북사업을 진행해왔다. 2007년 7월부터 지금까지는 개성공업단지 내 1단계 아파트형 공장을 건설 중이다.

개성공단이 열린 지 벌써 5년 정도가 됐습니다. 요즘 개성공단에서의 사업 현황은 어떻습니까?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완화가 되고 있는데, 아직 우리가 아는 상식의 벽은 굉장히 두껍죠. 미디어가 보도하는 내용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유로운 왕래가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기업하는 분들이나 북측 근로자나, 벽은 많이 허물어져 있습니다. 이건 물질적인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죠. 내부에서 신뢰가 쌓여가는 것입니다. 고무적인 현상이죠. 개성공단에 들어가면 순박해지는 것 같아요. 때 묻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일해서 그런지(웃음). 이건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남측 사람들의 공통적인 느낌일 겁니다.”

체제가 달라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사상과 이념이 개입하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같이 일을 할 수가 없죠. 개성공단에서는 그걸 다 제쳐두고 합니다. 민초들이 사상과 이념으로 싸워서 뭘 얻겠어요(웃음). 오로지 열심히 해서 좋은 물건 만들어 이득을 남긴다면 북한 주민들도 혜택을 보니까, 열심히 하는 거죠.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신뢰를 쌓는 기간입니다. 그 기간을 거치면 아주 유리한 입장에서 기업을 경영할 수 있습니다.”

개성공단의 상황은 이전보다 많이 완화된 편이죠?
“북측에 들어가서 사업하기가 편해졌죠. 절차도 간소화됐고, 법제조항이랄지, 입출입, 통신 등이 좋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입출입을 하루에 한 번씩 했어요. 지금은 하루에 10회 정도 움직입니다. 통신도 그래요. 처음에는 유선통신도 불가능했죠. 지금은 유선통화가 가능합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오히려 휴대전화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까 편안하죠(웃음). 입출입 서류 절차도 전에는 7일 정도 걸리던 게 이제는 3일이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개성공단의 의미는 어떻습니까?
“대북사업을 하는 남측 기업이 돈을 잘 벌어야겠죠(웃음). 그럼 북측 근로자들에게 돌아가는 보수나 복지가 더 좋아질 것으로 봅니다. 멀리 보면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이 나아지는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겠죠. 남북의 격차를 조금씩 줄여갈 수 있는 초석이라고 봐요.”

만선코퍼레이션과 (주)로만손 공장에서 일하는 북측 근로자들과 인터뷰는 불가능했다. 카메라 렌즈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작업에만 열중했다.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가면 스르륵 등을 돌렸다. 남 부사장은 “북측 사람들은 카메라에 찍히는 걸 매우 싫어한다”고 했다.

(주)로만손 개성공장에 들렀을 때는 점심시간이었다. 북측 근로자들은 마당에서 배구를 했다. 여자 근로자도 각 팀에 한 명씩 끼어 있었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밖으로 배구를 구경했다. 낯설기만 했던 오전의 풍경은, 오후가 되자 익숙해졌다. 개성을 ‘경제 통일의 초석’이라고 했던 미디어의 보도가 피부로 느껴졌다.

깨진 판타지와 여전한 벽
오후 4시, ‘입경’을 서둘렀다. 북측 CIQ에 도착해 들어올 때와 같은 수속을 밟았다. 북측 직원이 수첩에 적힌 내용을 훑어볼 때는 괜스레 긴장됐다. 수속대에 서서 증명서를 내밀었더니 내 이름을 부른다. “정우성 선생” “네?” 뒤쪽에서 관리원 두 명이 다가온다. “선생, 잠시 이쪽으로 오시라요.” 무슨 일일까. 왜 부를까.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선생, 소지품 중에 아침에 차에 두고 내린 게 있지요?”
“네? 네, 있죠.”

수속대 왼편, 좁은 복도 초입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가운데 놓인 책상과 양쪽에 놓인 의자 두 개. 옆에는 2인용 소파가 있다. 좁은 방, 경직된 분위기. 오전에 ‘잠시 보겠다’며 가져갔던 출력물 뭉치가 북측 관리원의 손에 들려 있다. 군데군데 밑줄도 그어져 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선생, 여기 좀 앉아보시라요” 머릿속이 복잡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떠올랐다면 과장일까.

“여기 보십시요. 정 선생은 이런 거 가지고 오면 안 된다는 거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출력한 기사 중에는 보수적인 논조의 사설도 있었다. 개중에는 탈북자 인권 문제에 대한 글도 있었다. ‘남한이 한낮이라면 북한은 한밤중이었다. 남한이 청동기라면 북한은 구석기였다`’라는 개성공단 방문기도 있었다. 모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체제를 비난하는 이런 내용이 적힌 인쇄물을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거 몰랐습네까? 여기 보십시오. 북한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만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빤히 있는데 없다고 하기도 곤란한 상황이다. 말문이 막힌 것은 다시금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아, 있네요. 그럼 어쩌죠?” 몰랐던 척 인정했다. 애써 웃어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몇 개의 비극적인 시나리오를 혼자 완성했다. ‘억류될 수도 있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했다. 의지할 사람은 남 부사장뿐이다. 개성공단 안에서 느꼈던 평화로운 분위기는 이미 어그러졌다. 이 방에서 느껴지는 건 여전히 두터운 이념과 체제의 벽, 그리고 긴장이다. “개성공단 내에서 체제나 이념은 제쳐두고 일한다”는 남 부사장의 말이 이제야 피부로 다가온다. 이때 남 부사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남 사장이랑 같이 들어온 선생 맞지요? 선생도 책임이 커요. 앞으로 잘해야겠어. 벌금 백 불 내고 가시라요. 없으면 정 선생 오늘 못 나갑니다.”

북측 관리원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농담을 할 상황은 아니다. 개성공단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달러다. 내 지갑에는 달러가 없다. 만원짜리 몇 장뿐이다. 대략 이런 공식이 성립됐다. “금지된 문서를 가지고 왔다→들켰다→벌금을 내야 한다→돈이 없다→못 나간다.”

마음속의 시계는, 순식간에 20년 전으로 돌아갔다. 마당에 떨어진 ‘삐라(대남선전물)’를 경찰서에 갖다 주면 연필 몇 자루를 주던 시대, 남북의 대립각이 더 첨예했던 시대, ‘간첩’이라는 말에 겁부터 나던 시대. 오래 되지도 않은 과거가 다시 현실이 됐다. 벌금을 내고, 벌금 납부 통지서에 서명했다. “개성공업지구 세관규정 제41조에 의하여 위와 같이 벌금을 납부할 것을 통지함”이라고 써 있다. ‘벌금 물리는 이유’란에는 ‘불순 인쇄물 단속’이라고 적혀 있다.
개성공단은 그런 곳이었다. 남측의 기업자본과 북측의 노동력이 만나는 땅, 철저한 협약과 규칙을 준수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민간 차원의 교류가 이뤄지는 땅. 공단 내에서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던 건 개성공단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여전히 벽은 두터웠다. 섣불리 가졌던 개성공단에 대한 판타지가 다시 깨졌다.

“제가 말씀드렸죠? 아직 벽은 두텁습니다. 철저해요.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세요(웃음).”
글쎄, ‘좋은 경험’이라고 하기엔 긴장의 정도가 심했다. 다시 남 부사장의 차에 오르고, 비무장 지대를 건너고, 남측 CIQ에서 보관함에 넣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원을 켜자 밀린 문자가 들어온다. ‘개성도 가고 좋겠다, 비행기 타고 가니?’ 친구의 살가운 문자는 오히려 순박했다.

개성은 몰라서 ‘판타지’였다가 너무 가까워서 놀랐다. 비행기는커녕 육로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땅이었다. 개성공단 풍경은 남북이 무척이나 가까워진 것 같아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언뜻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던 개성공단 풍경에 긴장이 풀렸다가 다시 느낀 이념의 벽은 60, 70년대로 돌아간 것 같아서 다시 비현실적이됐다. 개성에 머물렀던 7시간 남짓, 관념은 몇 번이나 깨졌다. 오늘의 일정에 ‘판타지’는 없었다. 자유로에 들어서자 긴장이 풀리고 잠이 몰려 왔다. 눈을 떴을 때는 다시 일산이었다.

글&사진 / 정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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