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시대는 갔다. 퇴근하면 피곤하다고 잠이나 자고 휴일에 TV를 보며 지내던 아빠들이 변하고 있다. 요즘 아빠들은 태교를 시작으로 아내와 함께 육아에 동참하고, 시간 날 때마다 자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들의 공부는 기본이고, 학교생활 더 나아가서는 사교육까지 챙기는 적극적인 아빠가 늘고 있다. 엄마들의 치맛바람보다 거센 아빠들의 바짓바람을 살펴본다.

자녀 교육을 돕는 슈퍼 대디
‘가은이 아빠의 영어짱 만들기(www.suksuk.co.kr)’라는 인터넷 사이트로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명한 가은 아빠 김해진씨는 대표적인 슈퍼 대디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김해진씨는 딸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자’는 마음으로 가은(8)이를 위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에 한 시간씩 영어 동요를 외워서 들려줬다. 퇴근 후 매일 2시간씩 불러주다 보니 외운 영어 동요만 1백여 곡. 영어 동화책을 읽어줄 때도 아이가 흥미를 느끼도록 주인공마다 목소리를 바꿔 실감나게 읽어주기도 했다. 매일 읽어준 영어 동화책도 이제 1천 권을 넘어섰다. 여덟 살인 가은이의 영어 실력은 미국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가 됐다.

“가은이가 태어날 때부터 영어에 항상 노출되게 했습니다. 이제 저보다 말도 잘하고 독후감, 에세이를 쓸 정도의 수준이 됐어요.”

김해진씨는 대표적인 슈퍼 대디다. ‘슈퍼 대디(Super Daddy)’란 집안일은 물론 아이들의 양육, 교육에도 적극적인 아버지를 말한다. 기존의 가족 부양을 중심으로만 규정되던 아버지의 역할이 가사는 물론 자녀의 학습 도우미, 친구 등을 자처하는 쪽으로 확산된 것이다.

딸의 공부 매니저를 자처하는 김정명씨(40)의 하루 일과를 봐도 슈퍼 대디란 말이 실감난다. 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의 불규칙한 출근 시간 덕분에(?) 김씨는 매일 오전 7시 아내 대신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딸들을 깨워 학교 갈 준비를 시킨다. 아이들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자신도 출근한 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또다시 딸들과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아내를 도와 저녁을 준비한 뒤 본격적인 공부 도우미로 변신한다.

일단 오후 7시까지 학원에 가야 하는 중학교 1학년 큰딸부터 그날 학교에서 배운 교과 내용을 재빨리 복습시킨다. 20여 분 동안 각 교과시간마다 수업한 내용을 간단히 말하게 한 뒤 숙제와 공부해야 할 부분을 체크하는 식이다. 큰딸이 학원에 가면 초등학교 4학년생 둘째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복습을 시킨 뒤 숙제를 도와주고 학습지와 문제지를 풀게 한다. 이따금씩 인터넷을 하고 싶어 하면 30분의 휴식시간을 주기도 한다. 특별히 공부를 도와줄 부분이 없다 해도 김씨는 딸들 방에서 책을 보며 함께 시간을 갖는다. 큰딸이 학원에서 돌아오는 오후 10시가 되면 딸들의 마지막 잠자리를 챙겨주고 김씨도 잠이 든다.

정재성씨(39)는 아직 아이들이 어린 탓에 공부보다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다섯 살, 일곱 살 형제를 두고 있는 그는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달려가 아이들과 놀아주고, 주말에도 여행이나 외출을 같이하며 아빠와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무엇보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녀 사랑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놀기 위해 정씨 스스로 개발한 놀이도 많다.

“온몸으로 부딪치며 같이 놀다 보면 아이들과 저 사이에 어떤 벽도 없어집니다. 혹시 늦게 되면 아내와 전화할 때 꼭 아이들을 바꿔서 통화를 합니다. ‘오늘 점심 반찬이 뭐였니?’ 혹은 ‘지금 뭐 해?’ 등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아이들이 항상 아빠가 같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해요.”

자녀의 학교 활동에도 적극적
슈퍼 대디들은 자녀의 학습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다. 엄마의 영역이었던 자녀의 학교생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실제로 주위 시선은 아랑곳없이 어린 자녀를 업고 유치원을 데려다주는 아빠들이나 유치원 설명회나 수료식, 입학식, 졸업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아빠들도 많다. 학교 급식 도우미나 운영위원회에 참석하는 아빠의 모습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회사원 이성민씨(40)는 지난해 1년간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재민(10)이의 학급에서 ‘멋진 아빠’로 통했다. 휴가를 내면서까지 엄마 대신 아들 학급의 급식 당번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급식 당번이 엄마만 하는 일이 아니라 아빠도 당당하게 참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학교생활을 직접 볼 수 있어 좋았고, 재민이는 물론 다른 아이들에게도 이런 일이 남녀 구별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죠.”

김철민씨(40)는 최근 아들 진혁(10)의 담임 김 모(28·여) 교사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놨다. “진혁이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게임을 하지 말랬는데, 어제 친구를 데려와 게임을 해놓고선 시치미를 떼더군요.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줄까요?” 그의 질문에 김 교사는 “아이가 저지르는 실수를 일일이 따지다 보면 바르게 성장하지 못한다”며 “작은 잘못은 눈감아주고, 방향이 틀렸다 싶을 때만 바로잡아 주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고민을 해결한 김씨는 학교 운동장에서 아들과 공을 찼다. 운동을 끝낸 뒤에 대중목욕탕에 가서 함께 목욕을 하고 집에 와서는 학습지와 학교 숙제도 같이했다. 김씨는 “자녀 교육 역시 자신의 또 다른 본업(本業)”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최근의 슈퍼 대디들은 자녀들의 학교 행사나 모임에도 적극 참여한다. 학교에 따라 학부모회나 어머니회, 명예교사회, 녹색어머니회, 아버지회, 청소년단체 후원회 등 임의단체가 있다. 주로 엄마들로만 구성됐던 이들 단체에 최근 아빠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들은 각종 학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기본이고 등굣길 교통지도나 일일교사로 나서기도 한다.

보다 적극적인 아버지들은 기존의 학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넘어 독자적으로 아버지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학교나 교사, 학생 간의 정보를 교류하고 학교 행사를 지원하며 야유회나 가족체육대회를 통해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송파의 한 초등학교 교실.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 불을 켜고 아버지들이 모여앉아 뭔가 열심히 의논하고 있다. 바로 이 학교의 아버지 회원들이다. 이 학교는 전국에서 국내 초등학교 사상 처음으로 아버지회가 만들어진 곳이다. 회원은 현재 30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자녀들의 교육은 어머니 몫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회원들 대부분은 자녀와 같이하는 시간을 늘리고 학교생활에 도움이 되는 활동이 뭘까 생각하다가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정기적인 활동을 통해 어머니들이 주로 했던 교실 청소에도 팔 걷고 나서고, 자녀 교육에 대한 정보도 나눈다. 학교 측에서도 아버지들이 교육 현장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슈퍼 대디, 자녀의 멘토가 되기를 꿈꾸다
슈퍼 대디의 등장은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고 주 5일 근무가 확산되면서 아빠들의 역할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예전처럼 아버지는 경제, 어머니는 자녀 교육 하는 식의 고정된 역할로 가정이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최근 이혼 가정이 늘어난 것도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아빠들의 등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두란노 아버지학교 김성묵 교장은 “기본적으로 자녀는 부부가 같이 관심을 기울이고 키울 때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어요. 여기에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아빠들의 역할이 필요해졌죠. 아이들도 아빠가 자신에게 관심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랑거리가 되어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라고 말한다.

슈퍼 대디 열풍은 교육적으로도 효과가 좋다. 「아빠의 놀이 혁명」 저자 권오진씨는 “아빠들이 아이들을 위해 바짓바람 역할을 해주는 것은 아이들의 창의력이 높아지는 매우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많이 놀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김광웅 숙명여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슈퍼 대디들의 출현에 대해 “영국도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부모 역할이 분명하고, 상류층으로 갈수록 역할이 모호해진다. 성격, 취향 등을 자녀와 함께 나누고 아들, 딸에게 남성의 모델이 돼준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따뜻한 보살핌이 단순히 아이의 정서적인 측면에만 관계된 것은 아니다. 대한소아과개원의 협의회 박재완 이사는 “슈퍼 대디는 아이들에 대한 배려심이 큰 아버지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아이들의 신체적 건강에도 긍정적”이라면서 “아빠가 아이들과 야외에서 함께 뛰놀고 신체적 접촉을 많이 하는 것은 아이들을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만들어 비만 등의 질병까지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녀 교육에 대한 아버지들의 관심이 느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나 방향이 잘못되거나 지나치면 부작용도 있을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경기 불안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며 피곤하게 살아야 하는 일부 아버지들이 ‘내 자식만은 나보다 잘 살게 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당장 지금 세상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규칙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한다. 자칫 잘못된 교육방식은 당장 눈에 띄는 성과는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자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아빠들은 자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되 자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고 제3자의 입장에서 자녀의 특성을 파악하고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게 좋겠다.

TIP 자녀 교육에 성공하는 아버지 되기 7

1 하루 30분 자녀에게 투자하라
자녀를 단지 마음속으로만 사랑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루에 30분은 자녀를 위한 시간으로 비워두자.
2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간절히 원한다. 부모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바쁜 아버지일수록 더욱 ‘사랑한다’고 표현해야 한다. 직접 말할 자신이 없다면 편지를 쓰자.
3 집에 와서 TV부터 켜지 마라 TV를 끄면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관계가 돈독해진다. 자녀와 함께 운동하고 독서할 시간도 생긴다.
4 독서 습관만큼은 아버지가 잡아줘라 인성이 훌륭하고 똑똑한 아이로 기르고 싶거든 반드시 독서하는 습관을 길러줘라. 아버지가 직접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아이가 독서 일기장이나 독서 기록장을 쓰도록 유도하자.
5 아침식사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바쁜 아버지일수록 아침식사만큼은 자녀와 함께해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자녀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게 할 수 있다.
6 인성 교육은 아버지가 맡아라 아이가 예절바르고 인성적으로도 훌륭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노력이 필수다. 어머니 혼자 자녀 교육을 전담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절과 인성 교육만큼은 아버지가 책임지자.
7 진로 지도는 아버지가 잘할 수 있다 자녀가 적성에 맞는 진로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회 경험이 많은 아버지는 자녀의 진로 지도를 하기에 적격이다.

Mini Interview
“화목한 가정은 아버지의 웃음에서 나옵니다”
두란노 아버지학교 교장 김성묵

Q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기본자세는 무엇입니까?
A
단순히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 경영을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는 결심, 그리고 실천이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늘 준비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Q 아버지가 자녀 교육에 참여하면 어떤 점이 더 좋습니까?
A
어머니만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아버지가 자녀 교육에 참여하면 자녀들이 소속감, 가치감,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나아가 사회성과 도덕성이 높아지고 성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이를 기반으로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습니다.

Q 자녀의 학습이나 인성 교육 중 특히 아버지가 맡아서 하면 좋은 분야는 무엇입니까?
A
학습에도 인성 교육에도 아버지의 역할은 필요합니다. 실제 아버지와 관계가 좋은 아이들은 학업 성적도 좋고 인간관계도 좋습니다. 아주 세부적인 것보다는 큰 틀에서 아이들의 학습과 인성을 보듬는 것이 좋습니다.

Q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자녀 교육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A
가장 중요한 일은 자녀들의 어머니인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감사해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과 존중과 배려와 감사라는 가치를 가르치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Q 자녀 교육에서 주의할 점은 무엇입니까?
A
눈높이 교육이 필요합니다. 눈높이 교육이라고 하면 낮은 수준으로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합니다. 부모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하며 어린아이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획 / 김민정 기자 글 / 이인재(자유기고가) 도움말 / 김성묵(두란노 아버지학교 교장) 일러스트 / 정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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